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仕事部屋

ブログやmixiやTwitterの一般化が進むに従って、人はただただ自分を見失い続けているんだろう。ネット上の別人格が妄想の世界を生きることはしんどい現実のガス抜きにもなるけれど、しんどい現実に向けて自分を閉ざしたままに、誰かとつながっている錯覚を得がちだから。そして、いざ現実でつながろうとするとき邪魔になるのは、結局、現実とちょっとずれたそれらの世界に残した、もう一人の自分の言葉だったりする。
「ネットでこんな嘘をついている自分は現実では他人から受け入れられないだろう」「ネットでこんな大層なことを言っている自分が現実でやれることはこの程度でしかない」と、自分にすら透けて見えてしまうのが現実だ。妄想に生きることを選ぶ人には幸せな結末でも、まともな人にそんな矛盾は耐えられない。
現実に生きたい、けれど何やらうまくいかない人が、安全でお手軽な妄想としてネット上に自我を形成する。ガス抜きして大丈夫なつもりになる。ほんとはちっとも大丈夫じゃなくても。
大丈夫じゃない自分に気づかないことが何より危険なのに、ガス抜きして大丈夫な気になって現実を生きる。当然、某かの事故が起きる。時にそれは事件にすらなる。

婚殺犯という秀逸な呼び名をつけたのは2ちゃんねるの人たちだけど、今や匿名性に甘んじる彼らの方がよほど健全だ。
読者がいようがいまいが発信される一個人の呟きより、匿名でもいいから気の利いた一言を求められる大衆としての2ちゃんねるの書き込みの方が、むしろ表現に対して貪欲なのかもしれない。

様々な事情があるとしても現実では何も行動できず、人とまともに関わり合うことにも不自由な状態なのに、ブログやmixiやTwitterでの「自分発信」を続けることで、その危機感を麻痺させて、生きているつもりになってしまう人たちは、だがいざ現実に生きることを考えたとき愕然とする。信じられるものが何一つない。パソコンと携帯の電源を切ったら人生が終わってしまう。恐ろしいに違いない。

だから、続ける。ブログやmixiやTwitterで。発信をしていれば消えてなくならない。

だが、そもそもは消えてなくなるものなのではないだろうか。
人の記憶、印象、関わり、悪感情にしろ好感情にしろ、人そのものが残すものはすべていずれは消えてなくなるのが本来だ。ログもキャッシュもミラーもない。

ワープロが世の中に出てしばらくして皆が気づいたのは、「これ使ってると漢字書けなくなるよね」という危機感だった。同じように、パソコン通信やインターネットを使いこなす人たちは「リアルで人と会わないでいるのなんかヤバくね」と気づいて、せっせとオフ会をする。
発信することで保つ自我は、コミュニケーション能力を持たない。

ワークショップでは、自己紹介のときに参加の目的を話してもらうのだが、「自分探しが目的のひと」と挙手させると、案外に多い。ちょっと昔の、私たちの世代が持っていた感覚としての「自分探し」とはまた違うそれなのだろう。

醜悪に肥大し続ける自我に押し潰されそうになった人が救いを求めるのが、何故、演劇なのか。自分ではない誰かになれるような気がするからか、日常で閉じ込めてきた自分を解放させられるような気がするからか。
なんにしろ、現実でそこに足を運ぶことを選んだ人には、何かを得る権利がある。
どれだけ言葉を使っても何一つ発信できない不自由を知り、人の生々しい在り方を知り、自我だのなんだのと難しいことを考える暇なく、ただそこにいることを要求される。
そこにいることができることのすべてと知る。
役者の指導が常々自己啓発に近くなるのは、そこにしか答がないからだろう。
だが、芝居の稽古場は、一人ではない。常に誰かと向き合い、更に観客に向けて曝すことを当たり前に求められる。

芝居の表現は、決して自己を解放しない。切り捨てたい醜悪な自我をそのまま抱えて立つしかない。そのままそこに居続けるしかない。自分の言葉など一言も持てない。すべての出来事は形になるそばから消えて行く。
芝居は、役者にとってむしろしんどい現実そのものだ。演じることで違う誰かの人生を生きられるなんてのは幻想に過ぎないし、そんな気持ち悪いことをする役者は、私にはいらない。

ワークショップに参加する覚悟のできた皆さんは、うんと自我を抑圧してきてください。それがたった一つの道具になるのです。

そう言って判りづらければ、言い直してもいい。

発信することで保つ自我は醜悪に肥大し続ける。可能な限り削ぎ落として来てください。あなたの自我の行き場は稽古場にはありません。

つまり同じことだ。レトリックではない。
  1. 2009/11/05(木) 12:25:20|
  2. 雑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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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トルなし

comment

블로그나 mixi 또는Twitter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서 인간은 그저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인터넷 상의 다른 인격이 망상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힘든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 해소가 될지는 모르나 힘든 현실에 대해 자신을 닫아버린 채 누군가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는 착각을 얻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누군가와 유대를 가지려 할 때 끝내 방해요소가 되는 것은 결국 현실과는 조금 어긋난 그쪽 세계에 남긴 또 하나의 내가 발설한 말일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다닌 내가 현실의 타인에게 받아드려질 리가 없어」「인터넷에서는 그럴싸한 말을 하는 내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정도 밖에 안 되」라며 본인에게 마저도 훤히 들여다보이기 망정인 것이 현실이다. 망상 속에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행복한 결말일지도 모르나 제정신인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순이다. 현실에 살고 싶으나 뭔가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손쉬운 망상으로써 인터넷 상에 자아를 형성한다. 스트레스를 풀고 괜찮아졌다 착각한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위험한데도 스트레스를 풀고 괜찮아졌다는 착각으로 현실을 산다. 당연히 모종의 사고가 발생한다. 때로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혼살범(結殺犯:최근 일본에서 잇달아 일어난 혼인사기 연속살인범)이라는 뛰어난 호칭을 붙인 것은 2채널의 주민들이지만, 이제는 익명성을 감수하는 그들이 오히려 더 건전하다. 독자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발신되는 일개 개인의 넋두리보다 익명이라도 좋으니 세련된 한 마디가 요구되는 대중으로서의 2채널의 글들이 훨씬 더 표현에 대해 탐욕적일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모로 사정이 있다 치더라도 현실에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 조차도 부자유스러운 상태이면서 블로그나 mixi, Twitter에서는 「자기 발신」을 이어감으로써 위기감을 마비시키고도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버리는 사람들은, 막상 현실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컴퓨터와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리면 인생이 끝나고 만다. 두려울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계속한다. 블로그, mix, Twitter에서. 발신을 멈추지만 않으면 없어져버리지 않는다.

허나 원체가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기억, 인상, 관계, 나쁜 감정이든 좋은 감정이든 사람 그 자체가 남기는 것들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 그 본질이다. 로그도 캐쉬도 미러도 없다.

워드 프로세서라는 것이 세상에 선보이고 난 얼마 후 모두가 느끼게 된 것은 「이거 사용하고 있으면 한자 쓰는 법 까먹겠다」라는 위기감이었다. 마찬가지로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을 활용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진짜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하다」라 느끼게 되고 부지런히 현실에서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발신을 통해 유지하는 자아는 의사소통 능력을 갖지 못한다.

워크숍에서는 자기소개 시간 때 참가한 목적을 말하도록 하고 있는데, 「자아 찾기가 목적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그 수가 의외로 많았다. 우리 세대가 갖고 있던 「자아 찾기」와는 뭔가 다른 개념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추악하게 비대해져만 가는 자아에 눌려 찌그러들 것만 같은 사람들이 구원을 찾아 다다른 곳이 왜 연극일까.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가두어 두었던 자아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어찌되었건 현실에서 거기에 참가하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을 권리가 있다. 죽으라고 말을 구사해봐도 무엇 하나 발신할 수 없는 부자유를 알고, 인생의 리얼한 모습을 알게 되고, 자아인지 뭔지 간에 머리 싸매고 생각할 겨를 조차 없고, 그저 거기에 있으라는 요구만이 있다. 거기에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배우를 지도한다는 게 늘상 계몽처럼 되어 버리는 것은 거기에 밖에 답이 없기 때문일 것이리라. 하지만 연극의 연습실은 혼자가 아니다. 항상 누군가와 마주해야하고 심지어는 관객들을 향해 노출할 것을 당연하게 요구 받는다.

연극의 표현은 결코 자아를 해방시키지 않는다. 잘라내 버리고 싶은 추악한 자아를 그대로 간직한 채 무대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대로 그곳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말 따위는 한 마디도 가질 수 없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발생하는 족족 사라진다. 연극이란 배우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힘겨운 현실 그 자체다. 연기함으로써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살아 볼 수 있다는 것은 환생에 불과하며 그런 매스꺼운 연기를 하는 배우는 내게는 필요치 않다.

워크숍에 참가할 각오가 되어있는 여러분은 있는 대로 자아를 억제하고 오세요. 그것만이 단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난해하면 바꿔 말해도 좋다.

발신을 통해 유지되는 자아는 추악하게 비대해져 간다. 최대한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오세요. 당신의 자아가 다다를 곳은 연습실에는 없습니다.

다시말해 같은 얘기다. 말장난이 아니다.
  1. 2009/11/12(木) 18:35:48 |
  2. URL |
  3. 翻訳@ガンホ会 #-
  4. [ edit]

長文お疲れさまでした!
  1. 2009/11/13(金) 03:58:07 |
  2. URL |
  3. あ #-
  4. [ 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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